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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슬레틱] 2010년대 인상 깊은 팀 : 몬텔라는 피오렌티나를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올렸다.

by rogo 2019.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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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인상 깊은 팀: 12/13 시즌 몬텔라의 피오렌티나

몬텔라는 부진을 겪던 피오렌티나를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올렸다.

2019년 4월 피오렌티나는 빈센조 몬텔라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했다.
(2012년 중도 부임 후 리턴)

지난 시즌 뒤늦게 팀을 맡은 그는 7경기 중 5패를 했고 0:0 무승부를 두 번 기록하며 간신히 강등에서만 벗어났다.

 피오렌티나는 이탈리아 출신 미국 사업가인 로코 코미소를 데려왔지만, 그는 여전히 몬텔라를 신임했다.

이번 시즌 피오렌티나는 안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지만 몬텔라는 여전히 자리를 유지하며 종신 감독 명단에 포함됐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가 첫 번째로 피렌체를 맡은 시즌에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아직까진 사람들 마음에 들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비행기’ 빈센조 몬텔라가 2012년 피오렌티나는 맡았을 때, 클럽은 정신이 없었다.

그전 시즌 그들은 첫 감독은 미하일로비치로 시작해서 다음에는 델리오 로시, 마지막으로는 임시 감독 빈센조 게리니까지 3명의 감독이 지나갔다.

그들은 철학도 없고 큰 그림도 없었다. 클럽은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일단 꼭대기부터 시작이었다. 스포르팅 디렉터 판텔레오 코르비노는 이탈리아의 젊은 재능을 발굴하는 능력은 탁월하다고 평가받았으나, 이젠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그는 잘렸고 로마 출신 Daniele Prade로 바뀌었다.  

 몬텔라는 카타니아에서 감독으로 한 시즌 놀라운 모습을 보이며 피오렌티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피오렌티나와 몬텔라의 진짜 혁명은 선수단에서 나타났다.

피오렌티나는 여전히 0910 챔피언스 녹아웃 스테이지까지 간 선수들 대부분을 보존하려 했으나 이제는 갈아엎을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프라데랑 몬텔라는 선수단의 75퍼센트를 여름 이적시장 기간 동안 갈아엎었다. 선수단은 재구성되었고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다.

이는 미드필더 지역에서부터 나타났다. 가장 주목받은 건 아무래도 팀에서 방출당하며 밀란으로 자유계약 이적했던 몬톨리보일 것이다. 그는 이전부터 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몬톨리보를 떠나보낸 몬텔라는 경기를 지휘할 새로운 선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피오렌티나는 마티아스 페르난데스를 영입했다. 그는 칠레의 우아한 10번이었다.

그리고 비야레알에서 스페인의 스타 이니에스타처럼 플레이했던 보르야 발레로를 영입했다. 그다음 몬텔라의 옛 로마 동료인, 데이비드 피사로를 전투적인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로 데려왔고 리버풀이 왜 데려갔는지 모르는 아퀼라니 역시 영입했다.
(아퀼라니는 리버풀에서 최악의 영입생 중 하나로 꼽힌다.)

갑자기 피오렌티나는 볼 다루는데 능숙한 선수만 4명을 보유했다.

몬텔라는 첫 주에 여러 우려 속에도 그들 4명 중 3명을 바로 기용했고 이처럼 말했다.

“난 퀄리티 있는 선수로 가득 찬 스쿼드를 가지고 있다.”, “내가 해야 하는 건 그들을 통해 공연장에 올려놓는 것이다.”

미드필더진의 개선으로 인해 피오렌티나는 2012년 평균 점유율을 55퍼센트까지 올렸다. 이는 리그에서 3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그전 시즌(몬텔라가 부임하기 전)은 49퍼센트로 리그에서 10위였다.

 그리고 점유율의 상승과 더불어 팀의 골 기록은 두 배로 상승해서 37골에서 72골로 증가했다. 몬텔라는 뒤에서 4번째였던 팀의 득점수를 리그 2위로 변화시켰다.

몬텔라의 포메이션은 다양했다. 보통은 3-5-2를 사용했지만 실제 경기장에서는 다른 모습이었다.

 윙백인 마누엘 파스칼은 올드스쿨 타입의 레프트 풀백이고(공격에 도전적이지 않으며 안정을 추구하는 클래식 풀백) 반대쪽의 후안 콰드라도는 공격적인 우측 윙백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기 중에는 433으로 자연스럽게 변했고 센터백 한 명은 콰드라도대신 우측 풀백으로 이동했고 투톱 중 한 명은 왼쪽 공격수로 옮겼다.

콰드라도는 그 시점에서 상대 풀백의 바깥쪽을 끊임없이 파고드는 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인 측면 선수가 되었다.

몬텔라는 앞의 공격수로 두 명의 선수를 활용했다. 요베티치와 아뎀 랴이치였다.

 이 둘의 콤비는 합이 잘 맞는 조합이었다. 요베티치는 그전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였지만 이전처럼 볼 점유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때 내려와서 연계 플레이를 하지 않고 끊임없이 파고드는 플레이를 했다.

야뎀 랴이치는 파고드는 요베티치 대신 광범위하게 주위를 뛰어다니면서 빠르게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측면을 파고들었다.

백3는 곤잘로 로드리게즈, 스테판 사비치 그리고 파쿤도 롱카글리아로 구성했다. 그들은 볼을 지닌 상태에서도 볼 다루는데 모두 능했고 수비 기여도 또한 훌륭했다.

피오렌티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영입 중 하나는 셋피스 달인 Gianni Vio이다. 그는 마치 사리를 닮은 외모를 가졌지만, 실제로는 순수하게 축구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특히 쉬는 시간이면 세트피스를 연구할 정도로 세트피스에 애착을 가졌다. 이 주제로 수많은 책을 낼 정도로 깊은 이해도 또한 함께 가졌다. 처음에는 발테르 젠가(Walter Zenga)에 의해 뽑혔고 나중에는 몬텔라에 의해 뽑혔다.

(발테르 젠가는 카타니아 감독 시절[2008-2009]에 Gianni Vio와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카타니아를 지휘했던 빈첸조 몬테일라[2011-2012]와 인연을 맺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데드볼 상황에서도 피오렌티나의 뛰어난 공격 집중력은 팀의 다양한 공격 루트를 통해 표현되었다, 혼란스럽게 만드는 수많은 더미런(상대 선수의 주목을 끄는 가짜 움직임), 그리고 당혹스러울 정도의 많은 선수들의 회전, 독특한 위치의 공격 벽 등을 선보이며 세트피스로 상대를 괴롭혔습니다.

*아래는 그 당시 피오렌티나의 세트피스 장면입니다.

 그 시절 몬텔라의 피오렌티나가 정말 인상 깊었던 건 그의 선수단 대부분이 새로운 선수들이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그들은 피렌체 정신마저도 갖고 있었다.
(팀을 위해 헌신했다는 뜻)

 서포터들은 이탈리아 국대 출신이면서 피오렌티나의 팬 에밀리아노 비비아노(골키퍼)를 뜨겁게 환영했다. 그는 자신의 딸 이름을 Viola라고 짓기도 했다. (Viola는 클럽의 색인 보라색에서 착안한 피렌체의 애칭)

 또한 2005-2006년 유로피언 골든슈의 주인공 루카 토니 역시 귀환했다. 처음엔 의아한 영입으로 평가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UAE에서 뛰다가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플랜 B로서는 완벽한 선수임을 증명했다. 8골을 넣으며 커리어를 화려하게 부활했고 36살에 그는 다시 첫 번째 옵션이 되고 싶어 이적을 했다. 그러고 다음 여름 베로나(당시 세리에 A 승격팀)로 이적한 그는 2 시즌 간 42골을 넣었다.

피오렌티나에게 시즌 중 가장 화려했던 순간은 양 밀란을 꺾은 순간이다.

먼저 시작한 건 AC밀란 상대로 3:1승리였다. 피오렌티나는 완전히 경기를 지배했다. 얼마나 지배했는지는 늦게 실시한 교체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몬텔라는 피사로, 아퀼라니, 발레로 미드필더 구성으로 시작했고 2:1로 만들었다. 그렇게 되자 그는 경기를 셧다운 하기로 맘먹었고 페르난즈를 투입했다.

이 화려한 10번은 수비를 강화하기보다는 점유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중에 몬텔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2:1상황에서 페르난데즈보다는 수비형 미드필더인 줄리오 밀리아초를 쓰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러나 이 팀의 DNA는 창의성이다.
(이 당시 빈첸조 몬텔라의 전술 철학을 알 수 있는 기록)

피오렌티나의 또 다른 영광은 추운 날씨의 2월에 보여준 남은 밀란, 인터밀란을 상대로 한 4:1 승리이다. 랴이치는 오픈 플레이 상황에서 헤더로 선제골을 넣었고, 요베티치는 놀라운 감아 차기로 팀의 2번째 득점을 해냈다.

 요베티치는 쉬지 않고 아퀼라니의 백힐을 받아 쐐기골을 넣었다. 이에 질세라 랴이치는 마지막으로 20야드 멀리서 골을 넣었다. 뒤늦은 인테르 소속의 안토니오 카사노의 득점은 팀에게 위로만 되었을 뿐이었다.

 4:1의 스코어는 피오렌티나가 얼마나 경기를 지배했는지 표현할 수 없는 스코어다. 실제로 이 경기는 체감상 한 6:0과 같았다. 이날 2명의 공격수들은 대단했다.
(이후 요베티치랑 랴이치는 인테르에서 뛰게 됐지만 많이 아쉬운 활약을 했다.)

현대 축구에서 팀의 퍼포먼스를 측정하는 수많은 통계들이 있지만 몬텔라의 피오렌티나를 요약하는 옛날 방식의 숫자를 들고 와보겠다. 그가 오기 전 피오렌티나의 관중수는 평균 21,412였다. 그러나 그가 오자 32,057로 뛰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당시 몬텔라의 피오렌티나는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싶게끔 만드는 팀이었다.


1차 출처 : 애슬래틱 공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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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athlet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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