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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축구 칼럼/번역 칼럼

[애슬레틱] 2010년대 인상 깊은 팀: 무리뉴의 인테르가 원하는 건 점유율이 아니라 오직 승리뿐.

by rogo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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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인상 깊은 팀 : 09/10 시즌 조세 무리뉴의 인터밀란

무리뉴의 인테르는 승리를 위해 점유율을 포기했다.

 지난 10년간 인상 깊은 팀을 뽑는 이 시리즈에서는 단순히 성공만이 뽑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혁신가들이거나 혹은 엔터테이너였나도 중요 포인트다.

 무리뉴의 트레블 인테르는 아마 후자는 아닐지도 모른다. 2009-2010 챔피언스리그 녹아웃 스테이지에서 그의 인테르는 확실히 수비 위주의 축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커리어를 통틀어 팀의 조직력을 만들어내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이를 활용해 시스템을 갖춰 팀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전술과 기용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리뉴가 축구의 즐거움이나 혁신에 관심이 적다는 것은 아니다, 인터밀란은 엄청나게 매력적이었고 중요한 팀이었다.

 티키타카, 즉 볼 점유를 중시하는 축구의 인기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올라가던 시절,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그런 축구의 절정을 보여주며 레전드가 되어갔고, 바르셀로나라는 당시 최고 클럽과 그 팀에 속한 여러 스페인 선수들을 가진 스페인은 이를 바탕으로 유로 챔피언, 그리고 이어서 월드컵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뉴는 이러한 볼 점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누 캄프에서 준결승 2차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날 미드필더 티아구 모타의 퇴장에도 나머지 10명의 인테르 선수들은 바르셀로나가 555개의 패스를 하는 동안 67개의 패스를 하며 버텼고,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1차전의 승리와 이날 경기를 통해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우린 점유율에서 이기는 걸 원하지 않는다. 왜냐면 바르셀로나가 압박해서 볼을 가져갔을 때 우리가 이를 쫓으면 우리 포지션이 흔들리게 된다. 난 우리의 포지셔닝이 흔들리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난 그래서 볼을 따내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원정에서는 주도권을 내줬다.”

볼 소유에 그 어떤 시대보다 가치를 더 높게 치던 시기였기에 이 말은 꽤나 주목할 만한 얘기였다.

이처럼 안티 풋볼로 불린 무리뉴의 인터밀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몇 개의 주의사항이 있다.

우선, 인테르는 사실 2차전에서 1:0으로 졌다.

그렇기에 볼 소유 내주면서 결과를 따내는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는 아니다.
(결국 패배했기 때문)

두 번째로 인테르는 홈에서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 상대로 그야말로 짜릿한 공격축구를 바탕으로 3:1로 승리를 거두었다.

 바르셀로나가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연기로 인해 항공기가 밀라노 경유하면서 600마일을 가는 뭐 이런저런 핑계가 있지만 그건 인테르 탓이 아니다.

 3번째로 인테르는 세리에 A에서 홈, 원정 가리지 않고 상대보다 볼 점유를 더 많이 가지면서 환상적인 경기를 자주 보여줬다. 그리고 리그 라이벌인 AC밀란 상대로는 4:0으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무리뉴는 냉철했다. 상황에 맞게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무리뉴가 되기도 했다.
(상황에 맞게 수비적인 축구, 안정적인 축구를 했다는 말)

무리뉴의 수비축구에 대한 선호는 사실 과장되어 있다.

 2003-2004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팀이었던 포르투는 13경기 중 10경기에서 상대보다 점유율을 앞섰고, 레알마드리드 역시 굉장히 공격적인 축구였으며 두 번째 팀 첼시 역시도 놀라운 콤비네이션을 보여준 팀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카테나치오로 유럽 대항전 우승한 이후로 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인테르에서, 무리뉴는 그야말로 아주 간단한 승리 공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해냈다. 마치 45년 전 인테르가 보여줬던 바로 그 모습과 비슷한 형식으로 말이다.
(단단한 수비를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축구)

 2008년 인터밀란에 도착한 무리뉴는 첫 번째 시즌 리그 우승을 거뒀다. 그리고 즐라탄을 바르셀로나로 보내고 사무엘 에투를 받아내는 역사적인 이적시장을 보냈다.

에투는 바르셀로나에서 트레블을 하고 건너왔으며 바로 다음 시즌 인테르에서도 트리블을 해내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었다.

에투만이 2009-2010 시즌 이적시장에 건너온 빅네임 영입은 아니었다.

인테르의 그해 여름 이적시장은 그야말로 놀라웠는데, 세리에 A에서 뒤늦게 주목받게 된 스트라이커 디에고 밀리토를 영입했다.

 그리고 그 당시 찾기 힘든 no.10 스타일의 공격형 미드필더 베슬리 스네이더도 레알마드리드에서 데려왔으며, 단단한 홀딩 미드필더 티아고 모타도 제노아에서 데려왔고 브라질의 센터백 루시우도 데려왔다.

고란 판데프는 1월에 라치오에서 데려왔다.

 그야말로 인테르는 한 시즌을 위해 단기적으로 효율적인 팀을 만들었다. 그들의 간판 4명 스네이더, 판데프, 에투, 밀리토는 모두 인테르에서 첫 시즌이었다.

무리뉴는 4-3-1-2와 4-2-3-1을 번갈아 사용했다.

후자는 좀 더 전형적인 현대 포메이션인데, 챔스에서는 기본 틀로써 사용했다.

 그러나 4-3-1-2는 상대적으로 지난 10년간 잘 활용이 안 되는 포메이션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이탈리아가 사랑하는 이 포메이션으로 세리에 A를 정복했다.

무리뉴는 공격형 미드필더인 스네이더를 그야말로 극한으로 끌어냈다.

 그가 그전에 데코에게 했고 그 이후에 메수트 외질에게 했듯이 말이다. 무리뉴는 창조적인 플레이메이커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지적과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무리뉴는 유럽에서 그 시즌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된 스네이더와 함께 기적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그는 무리뉴가 떠난 이후로는 놀라울 정도로 하락세를 보여줬지만 말이다.

스네이더는 주로 골을 담당하는 에투와 밀리토를 향해 왼쪽 라인에서 스루패스를 찔러주는 역할을 부여받았고, 이를 잘 해냈다.

수비적으로 인테르는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수비 스타일을 보였다.

무리하게 도전하지 않으며 안정적이게 라인을 구성하고 상대 선수의 플레이를 끝까지 지켜보고, 따라가며 막았다.

그런데 인테르의 주전 수비라인에는 이탈리아 선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브에 이탈리아 국적의 선수로 마테라치와 산톤이 있기는 했다.)

 높은 볼 점유율과 많은 수의 짧은 패스를 요구하는 그 당시에 센터백에게도 잦은 볼 소유와 플레잉을 요구했고 팀이 볼 소유를 잃었을 경우에는 높은 라인에서 빠르게 재 압박하거나 커버하여 대처하길 바랐던 시기였다.

 인테르의 주전 센터백듀오인 월터 사무엘과 루시우는 전진을 자제했으며 장기간 볼소유를 하기보단 빠르게 볼 방출을 택했고 팀의 박스 근처에서 볼을 막기 위해 합을 맞춰 좋은 콤비를 보여주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 둘은 낮은 수비라인에서 피지컬적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교묘하게 파울을 하며 수비했다. 만일 무리뉴가 경기 중에 수비 부분을 더 강화하고자 했으면, 마르코 마테라치나 이반 코르도바를 교체하거나 추가로 투입했다.

크리스티안 키부는 종종 센터백으로나왔으며 레프트 백이나 미드필드 지역에서도 뛰는 멀티플레이어의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여전히 가레스 베일에게 털렸던 기억으로 회자되는 마이콘은 우측 풀백으로 세계 최고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당시 브라질 대표팀에서 포지션 경쟁자인 바르셀로나 소속의 다니엘 알베스를 밀어낼 정도였다.

인테르는 중원에서 상대를 지배하고자 하면 바로 그렇게 만들어냈다.

모타는 단단하고 피지컬적으로 우수했다. 또한 바르셀로나 라 마시아 출신으로 그는 경기장 위에서 조율을 할 줄도 알았다.

 다른 미드필더 캄비아소는 아마 그가 속한 세대에서 가장 똑똑한 미드필더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좋은 플레이를 보여줬다. 데얀 스탄코비치는 상황에 따라 NO.10으로 플레이하거나 더 아래에서 플레이하며 선수들의 공백이 있을 때 이를 메꿔줬다.

 그리고 주장 자네티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으며 미드필더뿐만 아니라 양쪽 풀백까지 겸하며 팀이 트로피를 드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주장으로서 경기장과 라커룸에서 팀원들을 이끌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무리뉴의 인테르는 짜릿한 팀이었다. 4-3-1-2를 가동할 때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득점에 성공하면 4-2-3-1로 바꾸어 측면 미드필더가 수비 가담을 하도록 하여 두 줄 수비를 만들고 이를 통해 상대 풀백들이 못 들어오게 막아버렸다.

 그리고 무리뉴는 때때론 공격적인 선수를 교체로 투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마치 공격적인 변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굉장히 수비적인 변화였다. 슈퍼스타와도 같은 공격수들에게도, 공격적인 미드필더들에게도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에투는 세리에 A에서 3톱으로 나와서 상대팀들을 부수는 역할을 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대부분은 풀백 위치에서 수비하며 팀의 밸런스를 맞추는데 집중했다.

이 당시 인테르에 대해서 누 캄프에서의 경기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날보다 더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경기가 있다.

 바로 베르나베우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붙었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다. 이날 무리뉴의 인테르는 자신들의 방법을 그대로 보였다.

 시작과 동시에 측면 공격수를 퍼트려서 4-4-1-1로 만들었고, 뮌헨의 공격을 막던 인테르는 스네이더가 보내는 결정적인 패스 2번으로 밀리토가 2골을 넣으며 우승 트로피를 얻었다.

무리뉴는 자신의 바르셀로나 시절 보스였던 루이 반할처럼 챔피언스 리그를 두 번 제패한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반할 이 바르셀로나-아약스 철학을 구현하려 했던 반면 무리뉴는 매번 팀에 맞는 다른 방향을 시도했다.

마드리드에서 챔스 결승전을 치른 후 밀라노로 날아가 인테르의 우승을 축하하고 다시 마드리드로 날아가 레알과 계약했다.

그리고 무리뉴의 레알마드리드가 만들어졌다.

무리뉴는 이제 무엇보다 바르샤에게 대항하는 축구를 설파한 감독으로 여겨졌다.

 그의 공격적인 축구, 놀라운 팀을 이끄는 리더십, 많은 트로피 우승들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무리뉴는 이런 스타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주요 경기에 꺼내들었던 무리뉴의 수비를 기반으로 한 축구 철학은 매번 상대를 무너뜨렸고 트로피를 향해 전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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