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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축구 칼럼/번역 칼럼

[애슬레틱] 2010년대 인상 깊은 팀: 비야스 보아스의 공격수들은 포르투를 리그무패우승과 유로파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by rogo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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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인상 깊은 팀: 비야스 보아스의 포르투

포르투의 공격수들은 팀을 리그 무패우승과 유로파리그우승으로 이끌었다.

 비야스-보아스가 포르투에서 보여준 1년간의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은 첼시와 토트넘에서의 실망스러운 모습들로 인해서 묻히곤 했다.

보아스는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서 시간을 보냈고 이번 여름 마르세유 감독으로 그 팀의 팬덤으로부터 작은 환영을 받으며 부임했다.

비야스 보아스는 분명 유럽 축구 내에서 가장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기간이 있었고, Estadio do Dragao(포르투의 홈경기장)에서 짧은 부임 기간이지만 놀라운 성과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비야스 보아스의 비화들은 이미 너무 유명한 이야기이다. 바비 롭슨 경과 같은 아파트에 살던 16세 시절, 그는 공격수 도밍고 파시엔시아를 결장시킨 포르투 감독의 결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술적 비판글을 작성하였고 이는 감독에게 전달됐다.

  당시 감독이던 롭슨은 그를 자신의 옆에 바로 위치시켰고 FA의 코칭 코스에 넣어주며 자신의 제자로서 보아스를 키워냈다. 보아스는 20대 초반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서 테크니컬 디렉터를 보냈고 본인과 같이 바비 롭슨과 인연이 깊은 조세 무리뉴와 함께 스태프로 포르투, 첼시, 인터밀란에서 업무를 보았다.

 무리뉴는 롭슨 경의 수석 스카우트로 일하다가 매니저가 된 것처럼 비야스 보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리뉴는 자신의 전술적 접근 방법을 공식화해서 만들었고 그는 주도적이기보단 상대에 대응하는 형태의 감독이었는데, 비야스-보아스는 그와 반대로 공격 지향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접근을 많이 택했다.
(상대의 방식에 대응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고유적인 스타일을 만들고, 이를 밀어붙여 상대가 본인의 팀을 대응하게끔 만드는 축구의 지향점)

 그는 2009-2010년 아카데미카라는 포르투갈 리그의 클럽을 감독했던 짧은 기간에도 보였지만, 그는 이 팀을 강등으로부터 구해야 하는 상황에도 매우 매력적인 축구를 보여주려 노력했고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의 팀은 비록 약팀이었지만 포르투갈 리그의 빅 3 벤피카 스포르팅, 포르투를 위협시키며 자신의 잠재력을 보였다. 이를 지켜본 포르투는 새로운 무리뉴로 떠오르는 이 남자를 임명하기 위해 빠르게 접근했다.
(무리뉴는 포르투의 감독으로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해냈다.)

이처럼 리틀 무리뉴로 불려 왔던 비야스-보아스의 재밌는 점은 자신은 펩 과르디올라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얘기하며 무리뉴가 보인다는 평가에 대해서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곤 했다는 것이다.

 무리뉴는 바르셀로나의 접근법을 배워오긴 했으나(바르셀로나에서 통역관, 수석코치를 담당했었음) 그는 이로부터 멀어진 반면, 비야스-보아스는 그 색깔을 유지하며 433, 점유율 축구, 높은 수비라인 같은 바르셀로나가 축구에 접근하는 규칙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은 프리미어리그에서는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포르투에서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비야스 보아스는 포르투에 부임하면서 뛰어난 선수들이 포함된 스쿼드를 얻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 어쩌면 무리뉴가 2004년 챔피언스리그를 들던 때보다 더 좋은 선수들도 있었다.

무리뉴의 팀은 슈퍼스타 포워드가 부족했다.

그러나 비야스 보아스에게는 헐크와 팔카오가 있었다. 팔카오는 진짜 센세이셔널할 정도로 마무리가 뛰어난 피니셔였고 헐크는 우측 측면에서 인사이드로 잘라 들어오며 골문을 위협했고 어떠한 선수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실베스트리 바렐라 역시 직선적인 윙어로 좌측면을 주로 맡으며 팀의 승리를 도왔다.

 

 미드필더에는 슈퍼스타 주앙 무티뉴가 있다. 그는 리버풀로 떠나보낸 라울 메이렐레스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됐으며 그는 작은 소란을 일으키며 스포르팅에서 포르투로 합류했다.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는 점이 8년이 지난 지금도 울브스에서 여전히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무티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피지컬은 아쉽지만 딥라잉 위치에서 측면으로 패스를 뿌리면서 3명의 포워드에 부족한 창의력을 채우는 역할을 해냈다.

 무팅요에게 부족한 파워풀함은 오른쪽 중앙 미드필더인 페르난도 벨루스치가 메꿨다. 그는 앞쪽으로 오버래핑하면서, 헐크가 인사이드로 파고들 수 있게 해 줬다.

 벨루스치가 출전하지 못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에는 초장거리 드라이브 슛으로 기억되는 프레디 구아린이 그 자리를 메꿨다. 그들 뒤에는 브라질리언 선수인 페르난두가 클래식 홀딩 역할을 수행하면서 팀에 안정감을 주었고 페르난두가 두 센터백 오타멘디와 홀란두 사이로 내려오면 양 풀백은 측면 미드필더처럼 전진했다.
(라폴피아나)

 우루과이 국가대표 출신인 알바로 페레이라는 끊임없이 오버래핑하며 상대를 위협했고, 그동안 크리스티안 사푸나루나 호르헤 푸실레는 반대편에서 힘 있게 전진했다. 헬톤은 잦은 실수로 유명한 골키퍼였지만 10-11 시즌만큼은 훌륭했다.

포르투 축구 첫인상으로는, 직선적이고, 빠르며, 상대를 압도하는 무자비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더 깊게 살펴보면 좀 더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4백에서 3백으로 전환하며 상대를 끌어내며 포지셔닝을 흔든다.

 미드필더의 위치 변화를 통해 무티뉴가 딥플레잉 플메로 뛰면서 포르투 중원을 컨트롤했다. 헐크는 인사이드로 파고들고 이를 벨루스치나 구아린이 측면으로 뛰어들어가며 공간을 메웠다. 팔카오의 놀라운 움직임은 상대 센터백 두 명을 묶어두며 다른 공격수에게 공간을 만들어줬다.

이러한 움직임은, 놀랄 만큼 높이 올라간 수비라인과(하프라인에 근접), 볼이 없는 상황에는 콤팩트한 수비 블록과 함께 조합되었다. 당시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이러한 경기 스타일을 유행시키고 있었다.

펩은 유럽 대항전에서 내려앉은 수비수들을 깨뜨리기 위해 사용했고 비야스 보아스는 이와 똑같이 접근했고 시행했다.

어찌 됐든 왜 이 포르투 팀을 기억해야 할 만한 팀인지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보아스가 단순히 포르투갈 리그 우승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무패 우승을 했고 그 기록은 27경기 승리와 3번의 무승부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포르투갈 리그의 탑 3에 비해 다른 팀들은 불공정한 편이고, 작은 팀들은 이긴다는 건 그다지 특이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그럼에도 포르투의 많은 승리는 그들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특히 그들의 주된 라이벌인 벤피카를 12월에 5:0으로 박살 낸 경기를 기억해 내며 다시 살펴보자.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당시 벤피카 감독이었던 조로즈 제주스 감독은, 포르투의 오른쪽 측면을 걱정해서, 왼쪽 측면을 섣불리 강화했다는 것이다.

 다비드 루이즈(센터백)를 레프트 백으로 옮기고 파비오 코엔트랑(좌측 풀백 겸 미드필더)을 왼쪽 미드필더에 둬서 포르투의 강점인 우측면 공격을 어떻게든 수비 자원을 추가해서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포르투는 벤피카의 파격적인 시도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평소 하던 방식으로 플레이했다. 확실히 벤피카의 측면을 계속 흔들면서 5골을 뽑아냈다.

 루이즈는 헐크에게 끌려다녔고, 벨루스치는 시종일관 빈 공간을 오버래핑하여 침투했다. 자유로운 공간을 얻은 그는 30분도 안 되는 시간 3골에 관여했다. 앞선에 위치한 3명의 포워드들은 스코어 시트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팔카오 헐크는 각각 두골 바렐라는 한골 기록했다.

포르투가 벤피카를 놀라운 점수로 이겼다는 건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면 원정 가서도 2:1로 이기면서 우승을 타이틀을 따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경기는 재미없는 경기였다.

아무래도 웨스트햄 팬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겠지만 그때 벤피카 골키퍼였던 로베르트가 두 번 에러를 내면서 끝났기 때문이다.(현재 웨스트햄에서도 백업 골키퍼로 부상당한 주전 골리 파비안스키를 대신하여 경기에 출전해 연이은 실수로 팀 패배에 상당한 기여를 함...)

포르투는 이날 승리하며 경기장에서 리그 우승 셀레브레이션을 했고 벤피카는 불을 끄고 스프링클러를 켰다.

 그 후에, 비야스 보아스는 어쩌면 시간문제처럼 느껴진 트로피의 획득보다는, 좀 더 축구에 집중했다.(좋은 축구를 하면 트로피는 따라온다는 뜻) 그는 축구에 있어서 ‘Right way’를 보여주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유로파 리그에서도 포르투는 놀라운 질주를 이어갔다. 8강에서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를 총합 10:3으로 이겼고 준결승전에서는 비야레알을 총합 7:4로 이겼는데, 그 당시 비야레알도 상당히 매력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를 하는 팀이었다.

결승전에서는 더블린(아일랜드)에서 포르투갈 팀인 브라가를 상대로 팔카오가 헤딩으로 득점하며 1:0의 스코어로 승리를 거며 쥐었다. 이 우승은 비하인드스토리로 비야스-보아스에게 다소 가슴 아픈 일이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브라가는 전 포르투의 선수이면서 비야스 보아스를 감독 커리어로 이끈 파시엔시아가 감독하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보아스는 브라가를 꺾으면서 유로파 리그의 챔피언이 되었다.

보아스는 유로파리그의 챔피언이 되었음에도 결승전에서 1골의 득점, 즉 지금껏 보여줬던 퍼포먼스에 비해 저조했던 모습을 사과하면서 그는 과르디올라의 길을 계속 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직접 본 적 없는 감독이지만 펩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줬음을 증명하는 선언이었으며, 그는 포르투보다 큰 클럽으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 그러나 첼시가 부르자 비야스 보아스는 무리뉴가 7년 전에 걸었던 그 길을 향해 가게 되었다. 첼시에서 자신의 전술을 구현하지 못하고, 선수단 장악에 실패하며 첼시에서 경질당했고, 다음 클럽인 토트넘에서도 같은 실패를 겪으며 잉글랜드를 떠났다.

현재는 유럽을 떠난 보아스지만 포르투에서 보여줬던 보아스의 코칭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인상 깊으면서 최고의 유로파리그 우승 팀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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