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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축구 칼럼/번역 칼럼

[애슬레틱] 2010년대 인상 깊은 팀: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였다.

by rogo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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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인상 깊은 팀 :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

08/09 시즌의 바르셀로나는 예술의 경지였다.

마이클 콕스의 선택, 펩의 바르셀로나

 

 펩의 바르셀로나는 2008년부터 2012년 4년 동안 최고의 모습으로 전성기를 지녔다. 바르셀로나는 08-09 시즌과, 10-11 시즌 챔피언스리그의 위너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펩의 바르셀로나는 2000년대랑 2010년대 두 시대에서 최고의 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펩의 바르셀로나에 대한 질문 중에 더 흥미로운 질문은 이 두 팀 중 한 팀을 고른다면, 과연 어느 팀이 더 낫냐일 것이다.

 2009년 펩 과르디올라의 팀은 확실히 놀라웠다. 당시 유럽 축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축구의 트렌드를 혁명적으로 바꿨는데, 이는 당시 대세이던 수비를 기반으로 하는 안정적인 축구에서 볼 점유에 집중하는 방식의 축구를 다시 유행시켰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팀과 감독은 바로 펩 과르디올라와 FC 바르셀로나였다. 이 팀에 대해서 개개인 선수는 확실히 2011년보다 2009년이 더 낫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2009년의 HEM 라인의 사무엘 에투나 티에리 앙리는, MVP 라인의 페드로나 다비드 비야보다는 대중들에게 더 선호되는 선수이고,(M은 메시) 또한 야야 투레가 세르히오 부스케츠보다 많은 이들에게는 더 좋은 선수로 인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의 전체 모습을 보면, 2011년 팀이 더 우세하고 할 수 있다.

 큰 이유는 메시의 활용의 차이인데 펩은 2009년부터 가짜 9번으로 활용했지만 2011년엔 조금 더 미드필더처럼 플레이하게 했다. 이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과르디올라가 원했던 축구 철학의 기본 틀에 근접한 스타일이었다. 펩은 스트라이커와 미드필더의 역할을 모두 수행할 수 있는 선수를 원했다.

 그의 MVP 라인(메시-비야-페드로)을 활용 방법은 그야말로 놀라웠는데, 메시는 중앙에서 상대 센터백을 포지셔닝을 통해 끌어내리고 메시 대신 중앙으로 침투하는 양쪽 윙어 페드로나 비야에게 좋은 스루패스를 넘겨줬다.

 이 루트를 통해 비야와 페드로, 그리고 메시는 많은 골을 합작했고, 이를 통해 세계 최고의 팀과 세계 최고의 공격진이 되었다.

2011년의 바르샤는 공격 말고도 수비 상황 시 볼을 뺏는 압박도 그 당시 어나더 레벨이었다.

2009년과 201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을 비교해보자.

 각 경기는 2:0 3:1로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첫 번째 경기에서 바르샤는 하프라인에서 기다리며 맨유의 플레이를 어느 정도 용납했다. 그러나 두 번째 결승전에 들어가서는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고 전진하며 맨유의 볼 줄기를 시작부터 눌러버렸다.

 

 메시가 그야말로 공격수로서는 최고라는 주장들이 있다. (공중볼 싸움이나 헤딩은 부족하지만) 확실히 10-11 시즌에는 그다음 시즌들만큼 득점하진 못했어도 커리어 있어서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드리블 스탯 또한 유럽 전체에서 최고였다.

 오늘날 메시의 수비 부담을 줄이고 프리롤로 두는 것에 대해 활동량이 적어 팀원들을 고생시킨다는 비판도 있지만, 저 때 당시 메시는 엄청나게 활력이 넘쳤고, 다른 모든 선수들로 하여금 감독이 “야 메시도 저렇게 뛰는데 넌 안 하냐?”라고 말이 나올 정도로 하드 워커였다.

 메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났으며 무자비했다. 이를 보여주는 최고의 경기는 2010년 11월 레알마드리드를 5:0으로 꺾었던 경기라 할 수 있다. 아마 지난 10년간 선수 한 명이 한 경기 안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 중 하나라고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메시는 5 득점 중 1 득점도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의 키플레이어였다. 레알마드리드는 메시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제어할 방법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고 그대로 패배했다.

 바르셀로나의 전성기 동안 미드필더 지역에 있어서는 세 얼간이라 불리는 스페인 국적의 3인방이 등장한다. 부스케츠, 사비, 이니에스타는 최고의 미드필더로 유스 출신으로 1군으로서 클럽의 황금기까지... 지금까지도 자주 거론되는 역대급 선수들이다.

 그들은 1군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에게 코치받기 전에, 아카데미 시절부터 과르디올라를 롤 모델로 성장한 선수들이다.(펩은 바르셀로나에서 손꼽는 최고의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 중 한 명) 이 선수들 각자가 과르디올라를 따라 그의 역할을 유스 시절에 수행했다. 1군 데뷔와 함께 이들 중 이니에스타는 상대 수비수를 농락하는 훌륭한 드리블을 썩히긴 아쉬워 결국 앞으로 포지션을 이동시켰고 사비는 신체의 약점을 극복하고자 약간 전진했다.

 결국 1군에서 펩이 맡던 역할, 즉 후방 플메를 맡은 건 부스케츠였다. 펩에게 지시받은 부스케츠의 역할은 볼을 소유할 때, 아래로 깊이 내려와서 수비수 사이에 서서 백 3처럼 진영을 만들고 센터백과 골키퍼 서로 볼을 주고받으며 팀의 양 풀백들을 자유롭게 전진시켰다. (라폴피아나)

 전방에 있는 펄스 나인(가짜 9번) 리오넬 메시는 팀이 볼을 소유할 때 미드필더 진영까지 내려오며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위치를 플레이했고, 이는 세 얼간이(이니에스타, 부스케츠, 사비)와 함께 다이아몬드의 진영을 만들었으며 미드필더의 수적 우세를 통해 상대 미드필더들에게 끊임없이 압박하고,

그들 사이에서 볼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붕괴시켰다.

 펩르샤, 통칭 펩의 바르셀로나의 수비력은 그다지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않았지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10-11 시즌 바르셀로나는 38경기 21 실점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이들이 볼 점유에 집중하고 높은 라인을 바탕으로 한 고강도 압박으로 상대를 바르셀로나의 골문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서 만든 결과다. 이들에게 볼을 재빨리 뺏는 것은 볼의 점유율 증가 또는 유지가 되었다.

 우측 풀백의 다니 알베스는 그야말로 압박을 상징하는 남자였다. 끊임없이 전진하고 상대방의 찬스들을 막아냈으며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푸욜과 피케는 중앙 센터백 듀오로서 멋진 콤비를 보여줬고, 좌측 풀백인 에릭 아비달은 스타팅 라인업을 부상으로 인해 자주 이탈했지만 나올 때만큼은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팀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는 유로피언컵을 들어 올리는 마지막 두 달 동안 간 제거 수술로 힘든 생활을 보냈음에도 다시 복귀해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하비에르 마스체라노는 잉글랜드에서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바르셀로나에 영입되었지만 팀에선 주로 중앙 수비수로 뛰었다. 전진해서 볼을 끊어내는 모습과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볼 컨트롤과 패스에 능했기에 포지션 변경이 가능했다.

 이는 훗날 과르디올라가 하비 마르티네즈와 페르난지뉴와 같은 미드필더를 센터백으로 세우는 모습에 있어서 기초가 된 선수였다.

 그리고 골키퍼는 빅토르 발데스가 맡았다. 아마 바르셀로나 클럽에서 가장 저평가되는 선수로 꼽히기도 하는데 이유는 기존의 클래식한 골키퍼와 달랐다. 키가 작았고 지나치게 도전적이었다.

 그리하여 전에는 바르셀로나의 약점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그러나 펩 밑에서는 그의 혁신적인 골키퍼들 중에서 첫 번째가 되었다. 상대의 슈팅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볼 점유에 포함되는 골키퍼의 패스에도 더 좋은 패스를 하기 위해 집중하고 노력했다.

발데스는 볼 분배하는 플레이나 높은 수비라인에서 역습을 맞아 1 대 1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감 있게 뛰쳐나와 선방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펩을 만족시킨 최고의 골키퍼는 이후 스위퍼 키퍼를 대표하는 마누엘 노이어다.)

선수단 각 구성 말고도 2011년의 바르셀로나가 2년 전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요소는 바로 전술적 다양성이다.

2009년 4-3-3으로 플레이하며 단 하나의 대안은 메시를 중앙에 세우는 거였다.

그러나 2011년 들어서 바르셀로나는 진짜 많은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종종 부스케츠가 백 3의 센터백으로 내려와 플레이하며 마치 343처럼 보이게 플레이했고, 가끔은 알베스가 높게 올라가고 아비달이 내려오는 형태로 3백을 구성했다.

3백과 다이아몬드 미드필더 시스템을 조화시켜서 비엘사가 사랑하는 3313 시스템을 플레이하기도 했다.

클럽 월드컵에선 상대인 산토스와 경기를 할 때는 엄청난 미드필더를 쏟아부어서 포메이션으로 3-7-0을 완성시키기도 하였다.

 엘 클라시코에서 과르디올라는 그의 숙적 조세 무리뉴를 상대로 스타트 포메이션을 속이기도 했는데. 시작 10분에 들어서는 다른 포메이션으로 변형하는 트릭을 사용했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베르나베우에서 3:1로 이겼을 때이다. 펩은 부스케츠를 반은 미드필더 반은 수비수로 활용하며 알베스에게 오른쪽의 모든 포지션을 맡겼다.

이처럼 다채로운 전술을 사용하는 펩 과르디올라도 아직 상대의 전원 수비를 깨는 법은 마스터하지 못했다.

전원 수비를 시도하는 많은 팀들에게 승리를 따냈지만, 그들에게 무조건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전원 수비를 깨기 위에 많은 시도를 했던 펩은 특이한 전술, 전략을 개발해 냈다. 바로 우리가 바이에른 뮌헨과 맨시티에서 본 풀백을 안쪽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풀백에게 중앙 빌드 업을 맡기고, 그 자리에서 빌드 업을 맡았던 미드필더를 넓게 펼쳐진 공격진들의 사이 공간으로 침투시켰다. 이는 바르셀로나가 2012년 첼시나 레알마드리드로부터 역습에 맞으며 패배한 경험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안으로 이동한 풀백은 중앙에서 후방 플레잉과 동시에 상대방의 역습을 높은 라인에서 1차적으로 차단했다.

 이런 다채로운 모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도 바르셀로나가 그 어떤 축구팀보다 축구 그 자체를 변모시켰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극한의 볼 점유를 위한 미드필더 또는 윙어를 중앙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는 가짜 9번, 볼 소유와 분배, 조율에 집중하는 미드필더, 고강도 압박, 높은 수비라인, 골키퍼와 수비수들의 볼 플레잉, 스위퍼 키퍼의 활용 등 여러 전술, 전략을 보여주며 전 세계에 유행시켰다.

 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는 축구를 바라보는 지향점도 변화시켰다. 바르셀로나 주전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유소년 출신 선수들로 인해 유소년 선수들의 성장을 강조하게 하고 감독들로 하여금 클럽이 지닌 아이덴티티를 지키고 이해하도록 하게 하는 것 들 말이다.

(바르셀로나는 아약스와 바르셀로나, 네덜란드의 레전드 크루이프의 철학[크루이프즘]을 지키고 이어가고 있다.)

 바르셀로나는 올 타임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을 뒀다는 이점이 있긴 했다. 그러나 2011년 결승전 맨유를 상대로 미드필더 3명이 각자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3명의 공격수가 득점을 기록했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켜 보자.

이 팀은 그 어떤 팀보다 응집력 있고 조화로운 하나의 팀이었다.

그리고 이 팀을 만든 건 펩 과르디올라였다.


출처 : 애슬레틱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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