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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축구 칼럼/번역 칼럼

[애슬레틱] 2010년대 인상 깊은 팀: 비엘사는 칠레의 진짜 황금세대를 길러냈다.

by rogo 201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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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인상 깊은 팀 : 비엘사의 칠레 국가대표팀

비엘사는 칠레의 '진짜' 황금세대를 길러냈다.

(비엘사가 남미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이유)

마이클 콕스의 지난 10년간 인상 깊었던 팀, 비엘사의 칠레

비엘사는 칠레의 진짜 황금세대를 길러냈다.

 지난 10년간 최고 수준의 축구팀들 사이에서는 고강도로 전방 압박을 하는 기반의 축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9년 전 월드컵으로 돌아가 보면 그 대회에서 32개 팀 중 30개 팀이 상대 진영에서 볼을 빨리 탈취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볼을 잃으면 바로 자기 진영으로, 각자 자신의 포지션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그러나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두 팀은 예외였다. 첫 번째는 코어가 바르셀로나 팀 선수 기반이었고 자연스럽게 바르셀로나처럼 재빠르게 전방 압박을 가했던 스페인 국가대표팀이었다.

두 번째는 칠레다. 이 두 팀은 강한 전방 압박을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칠레는 볼을 따자마자 즉시 앞으로 볼을 보냈고 선수들은 볼이 도착할 곳을 향해 속도를 내고 달렸다. 반면 스페인은 볼을 달면서는 위협받지 않는 위치로 내려가면서 볼의 소유권을 유지했다. 이들의 축구 스타일은 확실히 다른 팀과 차별화되었다. 스페인은 바르셀로나의 영향을, 칠레는 감독인 비엘사의 영향을 받았다.

 지금에서야 비엘사라는 이름의 명성은 널리 퍼졌지만, 당시엔 2002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의 비극으로 다소 명성이 안 좋았다.

 그러나 칠레 국가대표의 감독으로 변한 비엘사는 색다른 전술 철학을 보여줬고, 팀에 입혔다. 그로 인해 칠레 축구는 확실히 변했다. 칠레는 1962년 이후로 월드컵 본선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으나 비엘사 아래서 두 번의 승리를 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조별예선 나머지 상대인 스페인을 만나 패배해 2위로 16강에 진출했으며 16강에 진출해선 브라질을 만나 패배하며 탈락하게 됐다.

 어찌 됐든 비엘사는 칠레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전에는 지극히 수비적이면서도 피지컬에 집중한 전통적인 남지 색이 진한 팀이 었지만, 비엘사 아래에서는 톡톡 튀는 축구로 변했다. 비엘사는 미드필더를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시켜서 위험할 정도로 바짝 끌어올린 수비라인에 빠르게 볼을 탈취할 수 있도록 기용했고, 골키퍼인 클라우디오 브라보를 공격적인 스위퍼 키퍼로 사용했다.

 미드필더 지역에서 칠레 최고의 인기 선수이며 볼을 다루는데 화려했던 피자로를 뺀 상태에서 힘이 좋고 활동량이 좋은 선수들을 넣어 매 경기 상대 선수에게 공격적인 맨 마킹을 하게 만들었다.

 공격에 있어서 비엘사는 항상 3명의 공격수를 일정 간격으로 퍼트렸고 그 뒤에 마티 페르난데즈나, 호르헤 발디바를 no.10(공격형 미드필더)으로 사용했다. 아르투로 비달과 알렉시스 산체스가 빅클럽으로 옮기기 전이었던 그 당시 비엘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 없이 이 어려운 전술을 구현해 냈다.

 비엘사는 3-3-1-3과 4-2-1-3, 2가지 포메이션을 경기 중에 계속 바꿔내며 활용했는데. 이 전환의 이유는 상대가 공격수 숫자에 따른 변화였다. 상대 공격수 숫자에 수비 진영의 숫자를 맞춰가면서도 그는 항상 후방에는 선수 한 명을 두 길 원했다.

이 짜릿했던 칠레는 화끈한 모습에 불구하고 많은 약점을 가졌다.

 그들은 골문 앞에서 중요 찬스를 너무 놓쳤는데, 이는 볼 소유를 바로 얻기 위해 많이 뛰어다니다 보니 정작 문전 앞 상황에서는 침착하게 마무리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선수 개개인의 단순 체력을 기반으로 하는 압박은, 잦은 부상을 얻거나 거친 파울로 많은 반칙들을 만들었고 하프라인에 가까운 높은 수비라인은 매번 역습에 고난 했다.

 그리고 미드필더였던 선수를 투입했던 수비라인은 작은 키로 세트피스에서 힘들어했다. 당시 센터백 역할을 맡은 선수들의 최고 장신이 177cm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엘사는 이러한 약점들은 자신의 축구가 가진 장점과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비엘사의 축구 철학은 약점이 없는 축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엘사의 칠레는 2010월드컵 16강에서 브라질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 경기는 그 해 토너먼트 중 전술적으로 지켜볼 점이 가장 많았던 경기였다.

하지만 칠레의 압박이 브라질의 빠른 공수전환을 당해내지 못하며 뼈아픈 역습을 맞았고 칠레는 이 역습에 무너졌다.

 비엘사는 칠레의 탈락 후에도 칠레 대표팀의 감독직을 유임하나 했으나 당시 칠레 FA의 회장이 바뀌었고, 협회와 갈등이 얽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팀을 나가게 됐다. 이후 사람들은 비엘사의 칠레를 좋아했기에 칠레 FA가 허튼짓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비엘사가 떠난 후 무너질 것 같던 칠레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비엘사의 대체자 클라우디오 보르기는 칠레를 맡아서 2011 코파 아메리카를 치렀다. 남미 팀을 주축으로 여는 대회지만 그 대회에서 칠레는 여전했다.

 상대를 지배했으나 많은 기회를 날렸고 세트피스에서 실점을 하며 경기를 진행하다 흥분한 선수들은 거칠어졌고 많은 반칙과 카드 수집으로 몇 명은 퇴장을 당했다.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지만 거칠고 화끈한 칠레의 축구는 이제 칠레만의 아이덴티티가 된 것처럼 보였다.

보르기의 후임으로 삼파올리가 뽑히자 이는 확실해졌다.

 비엘사로부터 영향받은 삼파올리는, 2년간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감독을 맡아서 3회의 리그 우승과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우승했다.

 그의 팀은 2012년 클럽월드컵을 우승한 코린티안스와 함께 지난 10년간 남아메리카 축구클럽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팀이었고 이는 그를 국대 감독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칠레 국가대표팀이었다.

“난 90년대부터 비엘사를 내 맘속에 멘토로 삼았다. 그가 내 축구에 전해준 아이디어는 내게 아이덴티티로 되었다.” 삼파올리는 설명했다.

 그의 놀라웠던 팀, 우니 데 칠레 미드필더 듀오였던, 찰스 아랑기스와 마르셀로 디아즈는 국대에 퍼스트 초이스였고 아르투르 비달은 삼파올리 밑에서는 보다 전진된 포지션을 맡게 됐다.

 이 3명의 미드필더는 매 경기 엄청난 활동량과 파워를 보여주며 당시 축구계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의 시대를 종식시켰다.

 칠레는 활력 넘치는 축구로 2014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비센테 델 보스케의 스페인을 상대로 2:0의 스코어를 만들며 승리했다. 비달은 부스케츠를 압박했고 아랑기스는 사비 알론소를 압박하면서 아주 거칠고 힘들게 만들었다.

 삼파올리는 전 대표팀 감독인 비엘사보다는 이상주의자로서는 약한 모습이지만 더 전술적으로는 유연했다.

 2014년 월드컵에서 가짜 9번을 활용한 4-3-3, 3-4-1-2,3-5-2의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2010년 월드컵 때처럼 칠레는 또 16강에서 브라질과 만나면서 떨어졌다. 교체 선수로 나온 마우리시오 피닐라가 주요 기회를 날리면서 승부차기로 향했고 칠레는 패배했다. 삼파올리의 팀은 승부차기 훈련을 게을리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승부차기로 뼈아픈 상처를 얻은 칠레는 이후 코파아메리카에서 승부차기로 두 번이나 우승했다.

 2015년 홈에서 우승할 때는 공격 vs 방어라는 재밌던 우루과이전과 우니 데 칠레의 또 다른 스타 에두아르도 바르가스가 두 골을 넣었던 준결승전( vs 페루) 승리까지 있었다.

 비엘사는 3톱을 고집했지만 삼파올리는 산체스와 바르가스, 이 엄청난 활동량을 보여주는 투톱을 사용했고 이 둘을 측면으로 벌리면서 비어진 중앙 공간은 비달이나 다른 미드필더가 날카롭게 침투하며 차지했다.

그리고 창의적인 no.10, 발디비아는 정말 감탄이 나오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이를 증명하는 게 2015년 칠레의 가장 최고의 선수는 그였다.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은 전후 스토리가 많았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비엘사 그리고 그의 후예였던 삼파올리가 지휘한 칠레가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경기장 위에서 핏불이라는 별명이 있는 게리 메델은 아르헨티나의 핵심 리오넬 메시를 묶어버렸다.

그리고 칠레는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해 열린 코파 아메리카 100주년 대회는, 칠레에게 있어 특별한 대회였다.

비엘사를 거쳐 삼파올리와 함께 전성기를 맞는 것처럼 보였던 칠레 대표팀은 삼파올리의 탈세 스캔들, 칠레 협회의 비리 스캔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었고 새로운 칠레 FA 회장과 의견 차이가 있었던 삼파올리는 자진사퇴를 하고 만다.

칠레는 후임으로 또 다른 아르헨티나 사람인 후안 안토니아 피지에게 감독직을 맡겼고 그와 함께 칠레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팀들을 토너먼트에서 모두 무너뜨렸다.

이 대회는 100주년을 맞아 남미 + 북미 협동 참가하는 기념적인 대회가 되었고, 새 감독 후안 안토니아 피지의 지휘 하에 칠레는 북미팀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강팀 포스를 뿜으며 8강에 진출했고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를 7:0으로 꺾고 8강에서 승리했다.

이 경기는 정말 인상 깊었던 경기 중 하나다. 산체스가 경기 내내 공격을 이끌면서 놀라운 드리블을 보였다. 그러나 바르가스야말로 이 경기 주인공이었다. 그는 4골을 터뜨리며 또다시 스타가 되었다.

4강전 상대인 콜롬비아 역시 2:0으로 이겼으며 결승전에 진출해 또 메시의 아르헨티나를 만났다. 이번 결승전도 승부차기가 우승을 가렸다. 칠레의 공격력을 생각하면 우승을 차지했지만, 무승부로 결승전 두 번 치른 건 아쉬울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어째 됐든 칠레는 진짜 황금 세대를 맞았다.

그동안 황금 세대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지만 칠레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칠레는 칠레 역사상 딱 두 번밖에 없는 국제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2015, 2016년 말이다. 이 세대는 또한 두 명의 칠레 역사상 최고 득점자를 만들었다.

바르가스와 알렉시스 산체스는 각각 38골, 43골을 만들면서 다른 전설인 90년대 듀오 마르셀로 살라스와 이반 자모라노를 넘어섰다.

칠레 역사상 역대 최고 선수 13명 중에서도 12명이 이 세대의 사람이다.

물론 이 우승 트로피를 들 때, 비엘사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기초를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비엘사의 칠레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비엘사를 시작으로 여러 감독을 거쳐 얻어낸 칠레의 성공에 대해서 눈여겨 보여야 할 점은, 칠레가 동시대에 앞선 트렌드인 압박 축구를 하면서 다른 국가보다 앞서갔고, 축구계에서 눈에 띄지 않았던 한 국가가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게 된 점이었다.


출처 : 애슬레틱 공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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